#1. 재회
  
#1. 재회





오늘도 허탕이었다.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주섬주섬 낚시 도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엔리케."



이상하다. 자신을 찾을 사람은 여기에 그 누구도 없는데.
하지만 분명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다 보았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아...로..?"



"....와.. 다행이다..  나..이렇게 커져 버려서...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아니, 혹시라도 날 잊어 버렸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잊어 버리지 않았다. 잊어 버릴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엔리케는 여전하네. 여전히 멋져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엔리케가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나는 여전히 엔리케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가슴이 떨려서.
........그래, 맞아. 늘 이런 눈으로 엔리케를 보고 있었어. 그래서 날 떠나간거겠지만."



"............"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 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말도 없이 떠나 버릴 수가 있었어...? ....엔리케가 떠나 버린 걸 알았을 때는, 죽고만 싶었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죽어 버리고만 싶었어. 삶의 이유가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린거야."




가슴을 푸욱- 하고 무언가 찌르고 들어왔다.

"게다가 나는-"

숨을 한 번 삼킨다.
억누르는 감정일까, 눈물을 애써 참고 있는것일까. 얼굴을 바닥 끝으로 떨구어 버려 어떤 표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그것.


"게다가 나는.. 엔리케가 떠나고 한달이나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어. 여행을 자주 떠났으니까.. 어느날 갑자기 엔리케가 보이지 않았을 때에도 여행을 간 줄만 알았어. 늘 말없이 떠나고는 했으니까. 한달 뒤에.. 오랜만에 엔리케네 집에 창문이 열려져 있어서 뛰어갔지. 하지만 그 집에 있던 사람은 낯선 사람이었어."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어떤 얘기를 할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귀를 막아 버릴 수는 없다.

"새로 이사왔다고.... 그때서야 엔리케가 떠난 걸 알았어.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한달 내내 엔리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집앞을 서성였어..... 정말이지 너무했어."



"........내가 없어야.. 나를 보지 않으면.... 그렇다면 아로가 날..."



"잊을거라고-?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 엔리케가 떠나고 하루종일 생각했어. 매일매일 생각했지. 1년 365일- 그렇게 5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엔리케 생각만 했어."



아까부터 가슴을 찔러오던 그 '무언가'는 더 깊이 가슴 속을 베고 들어와 심장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나, 나는... 아로가 나를 잊고.. 나에게 얘기 해주었던 것처럼 음악학교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며... 예쁜 여자친구도 사귀고... 그렇게 살고 있을거라고-"



"너무하잖아, 그거."


말을 가로막는 차가운 대답.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콘트라베이스? 음악학교? 엔리케가 없는데 내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15살이라고.... 어린애라고 내 마음까지 가볍게 본거야?"



"그렇지 않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어. 아로가 날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정말 혼란스러웠지. 나는 남..자이고... 아로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잖아. 나도 아로를 무척 귀여워했고 좋아했지만, 결국 아로와 내 마음은 다른거지. 아로의  그 '마음'에는 답해줄 수 있는게 없었어. 아로는 분명 힘들어질거고 결국 내 존재는 아로 너에게 짐이 될거야. 도저히 곁에 있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떠났어...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아로를 위해서 떠났다. 정말이야."


거짓이 아니었다.
5년 전, 떠나 오기 전 나의 진심이었다.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을만큼 엔리케만 생각했어. 그만큼 좋아했어. 엔리케에겐 한없이 어린 아이었겠지만, 나는 진심이었다고. 엔리케가 남자이든, 나이가 훨씬 많든 전혀 상관없었어. 뒷모습만 보아도 가슴이 터질만큼 좋아했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지. 스무살이 되면 꼭 엔리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할거라고.. 매일밤 잠 들기 전까지 생각했지.
.....이렇게 스무살이 되었지만, 옆집에는 엔리케가 살고 있지 않아."



아까부터 줄곧 고개를 푹 숙인채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얼굴을 바라 볼 수는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울고 있다는 것을.  지난 5년간, 자신이 저 눈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것일까... 하고 생각한 순간, 드디어 그 '무언가'가 심장까지 파고 들어왔다. 그렇다. 이제는 알 수 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그것은 '죄'였다. 자신이 지은 죄. 죄를 지은 것이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원망하고 미워해도 모자르다. 그런데도 이런 나를 아직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5년동안 머릿속에 가득찼던 것은, 다름 아닌 비겁하게 떠나 버렸던 자신의 이름. 숨을 한 번 들이 쉬고, 계속 말을 이어온다. 지금도 충분히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든다. 듣고 있을 자신이 없는데, 도대체 또 어떤 말을 하려는 걸까.




"남자의 고백 따위 기분 나쁘다고, 한심하다고, 내 앞에서 심한 말을 퍼부어도 좋았어. 상처받을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어. 받아줄 거라고는 감히 기대조차 하지 않았어. 혼자 애태우며 괴로운거나, 거절 당해 괴로운거나 어차피 똑같이 괴로운거니까. 그럴바엔 차라리 마음을 고백하는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나는 그저..... 그저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건데.... 하지만 그런 내게....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났지.. 엔리케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기운이 온 몸을 휘감았다. 이상하다. 지금은 여름이다. 쌀쌀한 바닷바람이 뺨에 부딪힌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마른 침을 겨우 삼키며 물었다.





"...어떻게 날 찾은거지...?"



부스럭- 가방 안에서 무언갈 꺼낸다.

"이거.. 보냈잖아. 떠나고 딱 3년만에..."

꺼내든 것은 닳고 닳은 작은 엽서 한 장.





"그건..."



"하루하루가 엉망진창이었어. 지옥같았지.. 그러던 중 엔리케에게 엽서를 받았어. 3년만에...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어.. 아직 어린 학생이었고 돈도 없고.. 당장은 찾아가지 못하겠지만,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찾아갈거라고."



"주소를... 쓰지 않았을텐데...? 도대체 어떻게..."



"...응. 그래서 형이랑 시리케가 가지 말라고 말렸어. 절대로 찾을 수 없을거라고 했지. 하지만 나는 이 작은 엽서의 소인(消印)하나로 충분했어. 엔리케가 고향에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분명 찾을 수 있다고 믿었어. 엔리케... 내게 고향 얘기를 해준적이 한 번 있었잖아. 기억 나지 않겠지만.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더라... 이곳에 도착해서 다섯달이나 걸려 버렸지만... 나는 결국 이렇게 찾아내었어. 눈 앞에 엔리케가 있다고."



".....서, 설마... 혼자 찾은거야?"


"응. 혼자 왔으니까.."








..........뭘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걸까.
5년만에 내 앞에 나타난 너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 2년전에 엽서 한 장을 보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주소는 쓰지 않았다. 저 작은 엽서의 소인 하나로 이 넓은 곳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혼자. 그 누구의 도움 없이. 그건 불가능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름과 나이만으로는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이곳에 와서는 필명으로 책을 내고 있다. 서점의 수십만권의 책들 중, 그중 어떤 책이 내가 쓴 것인지 찾을 수 있을리 없다. 출판사로 찾아가 내 주소를 알아내어 찾아왔을 확률은 그야말로 제로- 인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직접 찾아 다녔다......는 것. 믿을 수 없다. 1년이 걸리든, 2년이 걸리든, 3년이 걸리든 찾을 수 없을 수도 있는 일인것이다. 하지만 들려온 말은 분명 <다섯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다섯달밖에>가 아니다. <기적>에 가까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얘기 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짙게 주름이 패였다. 아무말도 할 수 가 없었다. 겨우겨우 지탱하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고개를 떨군 채 엽서를 꼭 쥐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음이 보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어 물어 온다.



"....가장 궁금했던걸 물어보지 못했네...
................결..혼은 했어...? 했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아니. 하지 않았어."


미묘하게 들뜬 어투로 되물어 온다.

"...연, 연인은...있어?"



"없어. 혼자 살고 있어."



"...그래? 와아.. 그랬구나.
나 엔리케를 찾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 세월도 많이 흘렀고... 엔리케도 서른넷이 되었잖아. 그동안 나만 나이가 든게 아니니까.. 사랑하는 여자가 있겠지, 누군진 몰라도 부럽다. 상상만으로 질투가 나서 돌아버릴정도로.... 아니다.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지. 혹시 아이가 있을지도 몰라. 아이는 엔리케를 닮았을까? 그 아이도 파란눈을 가졌을까?....예쁘겠네... 아니, 근데 그러면 나는 어떡하지? 역시 행복을 빌어주어야겠지... 그런 생각들을 했어.
.........미안. 마지막 말은 거짓말."



잔혹할 정도로 숨김없이 그대로 전해지는 마음.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찢어질 만큼 아파왔다.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로...? 5년만이잖아. 내 얼굴 좀 봐. 이런 식이라면 5년 전과 다를바가 없잖아..?
그때에도 늘 내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잖아."



"...응. 좋아했으니까."

갈곳없이, 희뿌연 담배 연기처럼 허공으로 내뱉어진 그 고백에 자신이 응해줄 대답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5년 전이 아니다. 받아줄 수 없다고, 떠나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로... 이렇게나 멋진 남자가 되었잖아? 이제 고개 들어 내게도 보여줘. 이렇게 키가 크고, 근사한 남자로 자라다니... 나, 놀랐어."


눈 앞의 소년, 이제는 소년이 아닌 그 <소년>이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았다. 볼품없이 구겨진 낡은 셔츠 끝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미소 지었다.






".......엔리케는 잘 지냈어?
......있지, 있잖아.... 나는... 나는 보고 싶었어. 엔리케가.
죽을만큼 그리웠어.
....나를 싫어해도 할 수 없어. 경멸해도 상관없어. 그냥... 옆에 있게만 해줘. 가끔 엔리케 목소리를 듣고, 멀리서라도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만 해줘. ........돌아 가라고 해도 갈데가 없어. 나, 모든걸 버리고 떠나왔어. 마음까지는 바라지 않을게. 날 무시해도 괜찮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도 좋아. 상대해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냥 옆에 있게만 해줘. 이렇게 부탁할게."






똑바로 부딪혀 오는 눈, 시선.
5년 전 자신을 한참 올려다 보던 그 작고 여렸던 소년은 거기에 없었다. 애써 셔츠 자락으로 닦아내린 보람도 없이, 눈물은 또다시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뺨을 타고, 목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방파제의 부서진 회색 콘트리트를 적셔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닦아내지도 고개를 땅으로 숙이지도 않았다. 그대로 자신을 향하고 있는 눈. 눈물로 얼룩진 투명한 호수색의 눈동자는,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눈이었다.




"아로는..... 내가 밉지 않아? 그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 버린 내가."


그대로 나의 눈을 응시한 채, 닦아 주고 싶어도 닦아 줄 수 없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흐느끼며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아니, 좋아하고 있어. 여전히 5년 전 그때처럼, 사실은 5년 전보다 더.
남자의 고백같은거 듣기 싫을테지만... 이런 내가 기분 나쁘다면 미안. 그렇지만 나도 내 자신을 어쩔 수 없어... 이렇게 가슴이 뛰어서 터져나갈만큼...... 나는 엔리케를 좋아하고 있어. .....없이는 이제 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제발 옆에 있게만 해줘......... 나, 절대로 귀찮게 하지 않을게...약속할게."












언제인가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을 본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다이아몬드의 색이 어떤 색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물색의 다이아몬드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분명 저 눈과 같은 색일거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이었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이토록 강하게 느낀것은.




하지만 그때에는 알지 못했다. 먼훗날, 눈 앞의 네가 나의 모든 것이 될거라고는.



- Fin -
(BGM - Brian crain , A Simple life)


  #2.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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