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집으로 가는 길
  
#2. 집으로 가는 길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들이 갈 길을 못 찾고 한데 뒤엉켜, 그 어떤 말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이리저리 맴돌기만 하고 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늘 하던 일상적이 말들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 그렇다. 『미안해』라거나 『울지 마』같은 말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없는 말들 같이 느껴진다. 아니, 사실 모든 것은 비겁한 자신을 합리화시키려는 교묘한 변명일 것이다. 감히 할 수 있을 리 없는 말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말들이라고, 비겁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어색하게 흐르던 침묵을 깨뜨리고 아로가 입을 열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이 흐르던 눈물이 멈추었다.



“바다는 처음 봐.”



줄곧 내 눈을 향하고 있던 눈이 살짝 옆으로 비켜 내 등 뒤의 바다로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 봤어. 우리집 근처에도 작은 호수가 하나 있었지만… 역시 많이 달라. 놀랐어. 호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고 아름답잖아. 바다라는 거….”


“기억나. 차 타고 호숫가 놀러가는 거 좋아했지, 아로…”


“아아-”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쓸쓸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사실은 핑계였어. 엔리케랑 함께 있는 게 좋았어. 그냥 그게 좋았어……. 호수든 어디든, 실은 상관없었지.”



바닷바람에 나부껴 헝클어져있던 가느다란 갈색 앞머리칼을 살짝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앞머리칼에 가려져 있던 물색의 눈동자가 다시금 보였다. 순간,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지. 나야 엔리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지만, 엔리케에게는 그게 아니었을텐데. 한참이나 어렸던 나와 대화가 통하는 것도 아니고… 즐거웠을 리도 없는데. 아마 많이 귀찮았을거야.”


“아냐, 절대로 그렇지 않아. 단 한번도 귀찮거나 한 적 없었어. 아로, 너… 무척이나 귀여워서, 같이 있으면 나도 즐거웠어.”



웃으며 말했지만 그런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바다를 향하고 있던 얼굴을 돌려 숙인다. 쑥쓰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5년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순간들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렇다. 기억해 내려 하지 않았을 뿐 언제나 사그라들지 않을 채, 이렇게 내 마음속 어느 한자리에서 계속 남아 있었다. 나를 올려다보던 작은 눈, 작은 어깨, 언제나 소매가 조금은 긴 듯했던 구겨진 셔츠, 그 속의 가녀린 팔목, 흙이 묻어 있던 운동화, 늘 한템포 느렸던 대답, 머뭇거리던 말투, 짧은 갈색 머리칼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귓가가 귀엽다는 생각을 했었다. 너무나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그 모습들이 지금은 보고 싶어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시간들이라고 생각되자 몹시 슬퍼졌다. 늘 말이 없이 고민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리니까 ─. 사춘기니까 ─.... <청춘>들만이 누릴 권리라고, 오히려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좋아해서 그런것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 너에게 나는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라던가, 『무슨 고민 있어?』 따위의 말들을… 웃으며 했던 것 같다. 미안해서, 부끄러울 만큼 미안해서 숨어버리고 싶은 것은 네가 아니라 바로 나이다. 고백이란 말이 없었던 것뿐, 사소한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좋아하고 있어』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나는 몰랐던 걸까.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파도 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아로의 갈색 머리칼을 붉게 물들이던 해도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을때쯔음.




“…돌아갈까? 우리집 바로 이 근처니까 조금만 걸으면 돼.”



아로는 얼굴을 들어 눈을 크게 떴다. 당황스런 말투가 귀에 박혀온다.


“아, 저, 저기… 나 아직 집을 구하지 못했어. 엔리케가 여기 있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았고… 아, 어떡하지……….”


“…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로를 바라보았다.


“저기… 그렇다면, 폐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 하루만 신세져도 될까…?”
“아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쓰지 않는 빈방이야 있어. 우리 집에서 같이 살면-”
“엔리케야 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하려던 말을 급하게 가로막고, 떨리는 손으로 가방 끈을 꼭 쥐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거… 굉장한 민폐고……….”
“아냐, 전혀. 아로가 괜찮다면 나는 좋으니까.”
“그게 아니라… 아, 물론 굉장히 고맙지만,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정말 생각도 못했지만………. 그래도 같이 살 수 있을 리 없어.”


집중해야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 듯 했다.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엔리케에게 좋아한다는 말. 오늘 이후로 절대로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들어줘. 나, 엔리케를 좋아해. 같이 사는 거 내게는 힘든거라고. 불가능한거야, 그거……. 게다가 엔리케에게 언제 연인이 생길지도 모르고….”



“……………………….”





...............바보인가, 나는.
오늘만큼 자신이 한심하고 바보 같다고 생각 한 적은 없었다. 더 이상, 이 이상, 싫어질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미워지고 있다. 아로를 위해 『같이 살자』고 했지만, 오히려 아로를 위한다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그래, 저 녀석은 나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같이 살자는 제안 따위, 녀석에게는 배려가 아니라 오히려 독과 같은 잔혹함인 것이다.



“저기…… 대신에…”
내 눈치를 한번 슬쩍 보고는 이내 눈을 다시 피했다.


“엔리케네 집 근처에…… 집 구해서 지내도 될까…?”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다. 겉모습은 자랐지만 여전히 5년 전 그때처럼 귀여운 몸짓과 말투였다.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이 모든 것이 슬픈것일까. 가슴이 욱씬거리며 아파왔다.


“응, 물론이야.” 라고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가리켰다.



“아로, 저기 봐. 우리집 바로 저기야. 저기 노란 벽돌 집 3층.”
“…와, 정말 가깝네. 창문에서 보면 바로 보이겠어. 바다가.”
“응. 갈까…?”




낚시 도구들을 챙겨드는 사이에 아로는 이미 걸어가고 있었다. 내 앞에서 몇걸음 더 앞서 걸어가는 아로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저기 아로. 얼굴을 보고는 아로인 줄 알아봤지만, 뒷모습을 보면 절대 몰라보겠어.”


걷던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틀어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늘 머릿속으로 내 가슴에 머리가 닿던 조그만 아로를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뒷모습만 보면 딴 사람같아.”



어깨를 다시 앞으로 돌려 계속 앞서 걸어갔다.


“엔리케보다는 크지 못했는걸, 뭐…”


아쉬움이 묻어나는 조금은 퉁명스런 말투. 이기적이게도 이 순간의 네가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5년 전이야 늘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자격이 없는 자신임에도.



“솔직히…. 부끄럽지만 말이지. 엔리케보다 키도 훨씬 크고 멋진 남자가 되고 싶었어. 그게 내 꿈이었어. 엔리케는 웃을테지만… 진심으로 그게 내 꿈이었어. 나, 우리 반에서 제일 컸어. 키만큼은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 5년만에 엔리케를 보니까 아니었네……. 역시 엔리케보다는 작아. 게다가 엔리케는 이렇게 더 멋진 어른이 되었어. 엔리케 앞에 서니 아직도 여전히 어린애일뿐이야, 나는. 뭐, 사실 어린애가 맞지만……. 도대체 <어른>이란거 언제 되는건지 모르겠어.”


“아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굉장히 멋진 남자가 되었어.”
나도 모르게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높여 말했다.
“여자였다면 첫눈에 반했을 정도로 근사한 남자인걸…!”



아로는 줄곧 앞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나를 향해 뒤돌아 보지는 않았다.
.........실수했다. 자신도 모르게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입 밖으로 꺼내 버린 말. 다시 주워 담아서 없었던 걸로 할 수 없다. 지금은 5년 전이 아닌데, 왜 이렇게 자꾸 실수를 하는 걸까. 이제는 이런 한마디에 상처 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가슴 언저리가 아파져 왔다. 한참을 그대로 멈추어 서있던 아로가 입을 열었다. 아무말 없이 그대로, 아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기, 엔리케… 알고 있었어?”
“……응?”
“나 어렸을 때, 엔리케 뒤에서 걸으면서 몰래 이렇게 엔리케 걸음걸이 흉내 냈었어.”



가느다란 긴 다리로 느릿느릿, 제자리에서 걷는 시늉을 한다.


“그게 정말이지 너무 멋있어서, 신기할 정도로 근사해서……. 늘 뒤에서 넋 놓고 봐 버렸어. 엔리케는 그것도 모르고 내 걸음걸이가 느리다고 했지….”


"………………………….”


대답 없이 계속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어때, 비슷해?" 라면서 뒤돌아 보았다. 얼굴을 보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아스팔트 바닥으로 주저앉을 뻔 했다. 겨우 그쳤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고 있었다. 또다시 이렇게 울려 버렸다. 도대체 몇 번이나 상처를 주고 나 또한 이렇게 다시금 상처 받은 너의 마음을 확인하며 가슴 아파야 하는걸까.


“엔리케가 여자였다면, 내게 기회를 주었을거야? 그거 좀 아쉽네……. 아니, 사실 많이 아쉽다.”


도저히 울고 있는 아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미안해. 말 실수 했어. 안들은걸로 해줘….”
그러나 미안하다는 나의 사과에 뒤를 이어 들려오는 대답 같은 건 없었다.



용기 내어 아까부터 주욱 궁금했던 걸 물었다.
“……저, 저기 아로… 콘트라베이스는? 계속 하고 있지…?”



“…팔았어.”


“뭐, 뭐라고?” 두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돈이 많이 모자라서….”
“그, 그런……. 말도 안돼…. 그거 아로 보물 1호라고 내게 얘기 했잖아…?”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이 자리에서 죽고만 싶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나를 보며 체념 한 듯한,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아…. 어쩔 수 없었어. 악기는 다시 사면되니까……. 그리고 보물 1호말야…. 바뀌었어.”
눈물을 스윽, 닦고 희미하게 웃으며 쑥스러 운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지만…. 이거야, 내 보물 1호.”



아까 가방에서 꺼내 든 뒤, 줄곧 오른손에 꼭 쥐고 있던 작은 엽서를 살짝 올려 들며 가리켰다.








잘 지내고 있냐는 단 한줄의 문장을 적어 보낸 작은 엽서.
주소도 쓰지 않았던 엽서 한 장.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사라지고 싶다. 사라져 버리고 싶다. 지금 이 순간 네 눈앞에서 또다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게 해달라고 너에게 부탁하고 싶다. 그렇다면 너는 또 나를 찾아와 줄 건가? 어떻게 해서든 또다시 나를 찾아 낼 텐가?





“엔리케를 찾으면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돌아가라고 해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어. 뭐 어떻게든 몰래 곁에 머무를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근데 문제는 바로 그 머무를 집이었어. 엔리케를 찾겠다고 결심한 뒤로 열심히 모은다고 모았지만… 집을 구하려면 택도 없었지…. 결국 콘트라베이스를 팔았지만 그래도 많이 모자랐어.”


한참을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연다.



“……형하고 시리케가 돈을 빌려줬어. 물론 그냥 나에게 주는거라고 했지만….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받지 않으면 날 보내주지 않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형이 그림 공부 하려고 모은 돈… 시리케가 가게 일로 모은 돈… 내게 주었어. 정말 어쩔 수 없이 받은거니까 엔리케도 날 못말리는 철부지로 생각하지는 말아줬으면 해. 앞으로 벌어서 반드시 갚을테니까. 덕분에 나 혼자 살 작은 집은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지금 너무나도 간단하게, 나를………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바보로 만들고 있다. 도대체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말 같은것은.




손을 머리카락으로 가져다 대며, 갈색 앞머리칼 몇가닥을 살짝 쥐었다. 또다시 물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근데, 엔리케 머리.”


아득히 멀어져 가던 정신을 겨우 차렸다.


“응? 머…리?”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그건 나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행동이었다.


“짧아졌네. 처음 봤어. 짧은 머리의 엔리케는…”
“아아, 더워서. 여름이니까…. 얼마 전에 잘랐는데. 왜, 이상한가?”





“………아니, 멋있어. 나, 새삼 반했어.”





어린 아이처럼 웃는다.
15살, 어렸을 때에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처음 보는 아이같은 너의 웃는 얼굴.




이상하다.
기분이… 정말 이상하다.
너의 그 짧은 한마디에 죽고 싶을 만큼 미안하고 슬퍼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져간다. 부끄러운 그 칭찬 한 마디가 마치 구원의 빛 같았다. 내게로 하여금 말 한마디도 할 수 없는 바보로 만들던 네가, 결국엔 이렇게 한 마디의 말로서 나를 구원해 주고 있다.









드디어 집 앞에 멈추어 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길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5분이면 도착할 짧은 거리가 마치 5시간처럼, 까마득하게 길게 느껴졌다.


“다 왔어. 여기 3층이야. 이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돼.”


라고 오른쪽 통로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로는 계단으로 올라가기 전 노란 색 벽돌을 스윽- 하고 손으로 만져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내쪽으로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음… 여기였구나. 여기서 살고 있었네. 그럼 미안하지만, 오늘 하루만 신세 질게.”



먼저 계단을 올라가는 아로를 뒤따라 올라갔다. 터벅터벅 올라가는 아로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아로의 <목소리>가 이런 목소리였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았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어른이 된 <이미 변해 버린> 너의 목소리. 늘 내 앞에서 말이 없어서, 어렸을 때의 목소리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얼굴이라던가, 귀여웠던 작은 행동들, 심지어 어떤 말투였는지까지 생각이 나는데 그게 어떤 <목소리>로 내게 들렸던 건지 도무지 떠올려 지질 않는다. 분명 귀여웠던 목소리였다…… 는 굉장히 추상적인 기억밖에 나질 않는다. 아쉬운걸까, 슬픈걸까, 미안한걸까, 그리운걸까……………… 아마도 그 모든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다.




- Fin -
(BGM - Brian Crain , Moonrise)



  #3. Key
  #1. 재회

목록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tonny


copyright(c)2004 All rights reserved by B.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