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길을 잃은 고백
  
#5. 길을 잃은 고백






“오늘 어땠어? 아마추어 치곤 꽤 하는데?”


톤이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중 아로는 사장과 마주쳤다.
“아, 사장님…. 아니에요, 실수도 많이 했고… 연주 팀에 민폐 끼쳐 버렸어요.”

눌려진 셔츠의 목깃 부분을 다듬으며 조용히 대답한다.
“아냐, 처음인데도 잘했어. 할 얘기가 있는데, 잠시 이쪽으로 앉아 봐.”


사장은 아로의 팔을 잡아 끌어 무대 바로 앞 쪽 테이블 의자에 앉히게 하고, 자신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아까 그 남자지? 너 연주 끝나고 내려가서 잠시 얘기 나누던 안경 쓰고 키 큰 남자.”
“네…? 무슨….”
스트레이트로 건넨 한 마디에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혼자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잖아? 면접 때.”
“………….”
대답을 하지 못하고 똑바로 얼굴을 응시해 온다.
“역시, 맞나보네.”
“…어떻게….”
“응? 뭐가?”
가늘에 뜬 눈으로 살짝 미소 지으며 모른 척 했다. 사실은 어떤 말을 물어올 지 알고 있었다.


“그, 그게… 어떻게 아신거죠…?”

당황하며 물어 오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는 웃었다.
“그렇게 얼굴에 <좋아 한다>고 붙여 놓은 주제에, 너야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남자 볼 때, 너 어떤 얼굴이었는지 알고나 있어? 마치 사랑에 푹 빠진 소녀 얼굴…이랄까?”
“아, 그, 그런….”
정갈하게 잘 생긴 얼굴이 일순 그림으로 칠한 것 마냥 새빨개진다.



“근데, 그 남자ㅡ 뻔뻔하네.”
“…네?”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 남자도 네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을 거 아냐?”
“………….”
애꿎은 테이블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대답이 없다. 그렇다. 상대가 모른다는 게 이상하다.



“자기를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말야. 이렇게 일 하게 된 첫.날. 보.러.오.고. 말야.
뭐야, 그거. 완전 대놓고 기대감 갖게 만드는거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
“보러 오라고… 보러 와 달라고 부탁한거에요.”
귀까지 새빨개 진 채 얼굴을 푹 숙이며 말한다.  아아, 이 녀석, 귀엽기까지 해…. 이런 남자가 혼자 짝사랑에 애태우는 모습을 보니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깝다> 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여자, 소개시켜 줄까?”
“네, 네?”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예쁜 여자 친구, 소개 시켜 줄게. 아니면… 남자가 취향? 그렇다면ㅡ,”
“그만. 그만 둬주세요. 부탁입니다.”
파르르 떨리는 작은 입술이 보였다. 사장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아로 너, 그런 얼굴 갖고 있는 주제에, 왜 짝사랑 같은 걸 하고 있는 거야? 이해가 안돼. 게다가 그 남자, 너보다 나이도 훨씬 많아 보이고, 키만 컸지 삐쩍 말라선. 누가봐도 네가 아깝잖아? 너, 앞으로 가족처럼 일할 사람이니까 충고해주는거라구.”
“…그 사람, 나쁘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멋대로 혼자 좋아하는거니까.”

가늘게 떠는 듯 했지만 단호한 목소리다.
뭐야, 이 녀석… 진심인가. 사장은 답답한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엔리케 때문에 콘트라베이스 계속 배운거에요.”
<엔리케>라…. 그 남자 이름이다.
왠지 아까 본  그 겉모습에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그만 두려고도 많이 생각했지만, 엔리케한테 들려주고 싶어서 계속 배운거에요. 덕분에 여기에서 일할 수 있게 된거고…. 그리고 엔리케, 오늘 처음으로 제 연주 들어준거에요. 5년만에….”






……할 말이 없어졌다. 뭘까.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덤덤한 말투여서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아아, 그, 그랬던거야…? 미안. 몰랐어.”
“……근데ㅡ 연주, 실수 많이 해버렸죠.”
뒷 목을 긁적이며 조금 웃는다.
…이봐, 웃는 척 하며 그런 표정 짓지 말라구,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너, 진심이구나.”



대답이 없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손목의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시간이 많이 늦어버렸다. 미안, 이제 그만 가 봐.”
“아,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나, 힘없이 처진 굽은 어깨로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굉장한 녀석이 들어왔군…. 여자는 미간을 찡그리며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게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눈앞은 깜깜했다. 가로등이 없었다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터벅터벅 가게 계단을 내려오다 빵- 하고 경적 소리가 울려 고개를 돌려보았다.
엔리케 차였다. 엔리케가 차에서 내려 천천히 다가왔다. 느릿한… 좋아하는 걸음걸이로 다가온다. 엔리케의 구두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미친듯이 뛰었다. 진정해, 라고 스스로에게 타일러봤자 헛수고였다. 이런 순간에마저 반하고 마는 자신이 이제는 우스웠다.
“엔리케…? 어떻게….”
“바래다 줄게. 타.”

길다랗고 마른 손가락으로 자동차 쪽을 가리켰다.
“계속 기다린거야? 설마….”
”아까 얘기도 별로 나누지 못했고 해서.”
“왜… 돌아가지 않았어? 이렇게 늦었는데.”
“굉장히 멋지던데? 놀랐어. 그렇게 잘 할 줄 진짜 몰랐어. 알고 있어? 나 네 연주 처음 들었어, 오늘.”

은색의 짧은 앞머리칼을 긁적이며 쑥쓰럽게 웃었다. 그 모습에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떨리는 다리를 엔리케가 눈치 채면 큰일이다. 한심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오른손 끝으로 바지를 세게 움켜 쥔 순간 머뭇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너 한번도… 들려주지 않았었잖아. 15살 때에는.”

“그, 그때에는…. 그게… 그러니까….”


눈물이 툭ㅡ 하고 흘러 내렸다.
옛날 얘기를 꺼내자 말로 할 수 없는 서러운 감정이 차올랐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엔리케 얼굴이 보인다.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앞의 남자에게 다시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현실이 서러웠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도, 두 번 다시 좋아한다는 말 같은 것, 할 수 없겠지. 희미한 가로등의 오렌지 색 불빛 사이로, 길을 잃어 버린 고백은 눈물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갔다.




-fin-



  #4. 그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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